2013/03/31 19:31

집단 선택(group selection) ; Steven Pinker의 비판 II Evolutionary theory

  집단 선택(group selection) ; Steven Pinker의 비판 I 의 후편입니다.  원문은 여기(http://edge.org/conversation/the-false-allure-of-group-selection)며 각주는 원문을 참고해 주십시오.  지난 번처럼 빨리 번역했기 때문에 세련되게 다듬지 않았음을 참고 바랍니다.

  문장이 길어서 짜증나기는 마찬가지.  근데 Pinker의 글을 보면 문장 길이가 좀 늘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저야 원문으로 거의 보지 않으니만큼 문장 이해에 어려움을 느낄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만.  

  漁夫

 

  3. Do Humans in Fact Have Adaptations that Benefit the Group at the Expense of the Self?
  3. 사람이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해롭더라도 집단을 이롭게 하는 적응을 보이는가?

  두 경험적 현상이 최근 집단 선택에 대한 관심을 크게 촉진해 왔다. 하나는 벌, 개미, 흰개미 등의 곤충 계열의 진사회성(eusociality)으로, 그 일꾼 또는 군인 계급은 직접 번식하지 않으려 하며 벌이 침입자를 쏠 때 죽듯이 동료들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 생명을 희생할 수 있다. E.O.윌슨은 자신을 희생하는 곤충이 군락(colony)을 이롭게 한다고 언급하며, 군락 사이의 선택으로 진사회성을 설명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생물학자들이 희생하는 개체가 여왕(그녀의 자매 또는 어머니다)을 이롭게 한다고 지적하며, 진사회성을 가장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여왕이 번식할 때 새 군락을 만들므로 여왕 안에 있는 자신의 유전자 사본에 이롭기 때문에 자기 희생을 촉진하는 유전자가 선택된 것’이다.[5] 이는 개체가 군집적 유기체를 만들고 세포가 몸을 만드는 것 같은 선택된 소수만이 번식하는 유전적 친족들의 다른 집단들에서도 진실이다.

  다른 현상은 전쟁에서 보이는 순교주의(martyrdom), 무임 승차자를 비용을 들여 가면서 징벌하는 것, 이방인에 대한 관대함 같이 사람들 사이의 이타주의와 자기 희생의 존재이다. 집단 선택론자들은 곤충의 진사회성에 인간 사이의 자기 희생을 자주 유비하며, 양편을 모두 집단 선택으로 설명한다. 책 제목이 인간과 사회적 곤충의 진화적 성공을 암시하는 ‘지구의 사회적 정복(The Social Conquest of Earth)’에서, 윌슨은 (56페이지에서) “불가피하고 영원한 전쟁이 명예, 미덕, 의무 등 집단 선택의 결과인 쪽과 이기심, 비겁함, 위선 등 개체 선택의 결과인 편 사이에 존재한다.”고 썼다. ‘정당한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조나산 하이트(Jonathan Heidt)는 “인간은 90퍼센트 침팬지고 10퍼센트 벌이다”라 제안하며, 권위에 대한 복종, 사회에 대한 충성, 사회적 규칙에 대한 순응 같은 도덕적 직관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그에 동의한다.

  많은 의심쩍은 주장들이 본성적(inherent) 미덕, 인간의 도덕적 직관, 집단에 이로운 자기 희생, 집단 선택 이론의 무리에 묶여 들어간다. 하나는 다른 집단과 경쟁할 때 자신의 집단을 이롭게 하는 희생과 동일시하는 미덕이 있는 규범적 도덕 이론이다. 만약 그것이 미덕을 이루는 것이면, 파시즘이 궁극적인 고결한 이데올로기고 이기심의 궁극적인 형태에 대한 인간 권리의 실행일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윌슨이 뜻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명백히 더 이타적인 무엇과 개인적 이기주의를 대조하기 원했으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은 그의 집단의 경쟁적 이점에 기여하는 것처럼 썼다. 그러나 그 이분법은 다른 가능성을 무시한다; 개인이 그가 속한 집단의 경쟁 기량을 높이건 아니건 다른 개체(원칙적으로는 모든 인간, 또는 모든 의식 있는 생명체들까지도)를 이롭게 하여 고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타주의, 곤충의 진사회성, 집단 선택을 한 데 묶어 생기는 다른 문제는 곤충의 진사회성 자체는 윌슨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집단 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검증을 위해 임시로 그 유대 관계의 한 부분을 줘 보자. 진사회성을 유전자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유전자를 따라 전할 수 있는 작은 수의 여왕에 대한 불임 일군과 군인들의 근친도에 의존하며, 물론 그 번식 체계는 인간 집단에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논의에 의하면, 사람은 사회의 이익에 기여하는 점에서 벌과 같다. 곤충 진사회성에 대한 유전자 중심 이론을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으므로, 거기서 벌을 설명할 필요가 아마도 없다. 그 경우, 가장 절약적인 이론은 집단 선택으로 인간의 이타주의와 곤충 진사회성을 모두 설명할 것이다.

  따라서 당장에 ‘사람의 심리학이 진짜 벌하고 비슷한가’라 물을 수 있다. 벌이 침략자를 쏘아 [결과적으로] 자살할 때, 아마도 꽃꿀을 먹거나 편안한 온도를 찾는 것만큼 일차적 동기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집단-선택적 적응으로 선택받아 왔다면 그렇게 했을 것처럼, 사람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폭발로] 날려버리거나 기관총 화망 쪽으로 전진하도록 자원하는가? 내가 읽은 심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협동 연구, 역사학자들과 정치 과학자들의 집단 경쟁 연구들은 인간은 전혀 벌 같지 않다고 제안한다.

  인간의 협동의 진화에 대한 방대한 문헌은, 인간 인지의 복잡성에 수반되는 2~3개의 왜곡(twist)들이 있긴 하지만, 진화생물학에서 얻어진 이타주의를 위한 두 유전자 수준의 설명인 족벌주의(nepotism)과 상호성(reciprocity)을 적용하여 상당히 잘 해 왔다.

  인간의 족벌주의적 이타주의는 친족과 같아 보이는 사람에 대한 온화함, 결속, 인내의 감정으로 이뤄진다. 이는 그런 감정들을 유전적 친척들에게 품도록 하는 어떤 유전자도 그 친척들 안에 있는 자신의 사본에게 이로울 것이기 때문에 진화했다. (흔한 오해와는 반대로,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범하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친척들을 사랑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타주의의 방대한 분량은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이 친척 아닌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비교하여, 그것들은 친척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양육하고, 호의를 베풀고, 근처에 살고, 보호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상처 입히기를 피하고, 싸우기를 피하고, 장기 이식을 하며, 유산을 남기는 것과 훨씬 많이 닮았다.

  인지적 왜곡은 사람들 사이에서 친족을 인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조작할 수 있는 환경적 단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7] 즉 사람들은 입양 친척과 군대의 전우, 남학생과 여학생 클럽, 직업적 및 종교적 형제애, 범죄 집단, 조국, 모국에 대해 역시 이타적이다. 이런 가짜 가족(faux-family)들은 은유, 가족 경험의 모방, 공통의 조상이나 육체의 신화, 그리고 친족 관계의 다른 허상이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쓸데 없는 의식화나 신화화는 만약 ‘그 집단’이 본능적인 충성을 유도하는 기초적 인지 직관이었다면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 대신, 충성은 우리가 유전자를 공유할 듯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발동시키며, 다양한 조작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이타주의의 다른 고전적 형태는 상호성이다: 두 개체(agent)가 호의를 교환하는 관계를 개시하고 유지하며, 각각이 자신이 착취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한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인간 협동의 매우 많은 분량을 이 이론으로 우아하게 설명할 수 있다.[8] 사람들은 통상적인 감각과 게임 이론의 기술적 감각 모두에서 자신에게 약간의 비용만 들여 이방인에게 큰 호의를 기꺼이 줄 것이라는 점에서 ‘훌륭한’데, 서로 득이 되는 장기간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호 이타주의자가 간청하거나 돌아오는 호의 없이 남을 전혀 돕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오해다; 사실 그 이론은 그들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공감할 것이라 예측한다.) 사람들은 다른 개인을 인식하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고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을 도와 온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끼며, 자신을 착취해 온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미래에 협동하기 위해 자신이 착취해 온 사람들에게 의지한다면 후회를 느낀다.

  이 공식에 대한 한 가지 인지적 왜곡은 사람이 직접적인 개인 경험으로만 착취자에서 상호주의자를 분별할 뿐 아니라 주위에 물어보고 상호주의자인지 착취자인지 평판을 알아낼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생물이란 것이다. 이것은 차례대로 개인의 평판을 세우고 과장하며 (사회 심리학자들이 폭넓게 발표해 온 인간 심리학의 한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과장들을 궤뚫어 보려는 시도에 대한 인센티브를 만들어 낸다.[9] 그리고 이타주의자가 되는 데 회의적인 사람들의 조사하는 눈초리에서도 이타주의자로서 평판을 믿을 만하게 확립하는 한 방법은, 자신이 이타주의에 헌신하는 것이다(그리고 간접적으로, 단기적으로 개인의 희생을 대가로 한 잠재적 장기적 보답이다). 세 번째 왜곡은 틀림 없는 지식이 아니라 확률적 단서들이, 친족주의처럼 상호주의도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다시 서로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을 대표하는 한, 사실 다시 마주치지 않을 다른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풀 수 있음을 의미한다.[11] 이들 왜곡 때문에, 상호 이타주의 이론이 ‘[사람들의] 관대함은 거짓이며, 사람들이 각각 신랄하게 자신을 위해 뭐가 될지 계산할 때만 서로에게 잘 해 준다’고 암시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대조적으로, 도덕적 정서와 평판 관리가 그들의 실제 공헌에 관계된 평판을 부풀려 집단의 이득에서 [자신의 이득을 더] 뽑아 오는 개인에게 이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집단 선택은 그 둘이 인간 이타주의를 끌어냄이 틀림없다는 점을 예측하는 데 실패한다. 개미, 벌, 또는 흰개미가 동정, 분노, 감사, 또는 한 벌이 다른 벌들의 평판을 관찰하거나 자신의 평판을 관리할 동기 같은 도덕적 정서를 보인다고 믿을 이유도 전혀 없다. 집단의 이익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는 규칙에 따라 작동할 듯 하다. 역설적으로, 윌슨 자신은 집단 선택론자로 나서기 전에, 개미와 같이 [그 논리로] 인간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자의 격언에 대해 이렇게 판결했다; “이론은 훌륭한데 종(species)이 틀렸다.” 하이트 역시 최근까지 족벌주의와 상호 이타주의란 표준적 이론으로 도덕적 정서를 설명하는 데 만족해 왔다.[12]

  집단 선택을 지지한다고 직접적으로 제시된 단 하나의 경험적 현상이 사람들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듯한 실험적 게임들의 모임이다.[13] 실험실판 공유 재화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일정 금액의 돈을 받고 팀의 상자에 원하는 만큼 돈을 넣도록 권유받는데, 다음에 [상자에 모인 돈을] 실험자[수]로 곱하여 골고루 나눠 주게 된다. 집단에게 최선의 전략은 모든 사람이 최대로 돈을 넣는 것이고, 개인에게 최선의 전략은 무임 승차하고 공공 기여분을 줄여서 집단 분배와 개인 돈을 모두 얻는 것이다. 계속 이 실험을 반복하는 전형적인 실험에서는, 무임 승차가 전체를 지배하고 집단 기여분은 0(zero)으로 줄어든다.

  자연스러운 결론은 이 실험이 사람이 공유 재화를 위해 희생하는 기회에 투자하는 집단 선택 적응을 드러내지 않음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이 연구는 과정 하나를 바꿔서 생긴 결과 때문에 집단 선택의 증거로 해석되어 왔다. 사람들에게 무임 승차자에게 벌금을 물릴 기회를 줄 때, 무임 승차는 감소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이 증가한다 – 여기엔 놀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가끔 처벌의 특권을 얻으려면 돈을 내야 하더라도 무임 승차자를 처벌하며, 실험자가 모두 익명이며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 말해 줘도 그렇다는 점이다. 처벌에 비용이 들고 시민의 마음 자세에 대한 평판으로 보상을 받지 않더라도, 그 때문에 ‘이타적’이라 불려 왔으며 집단 선택된 자기 희생에 대한 증거로 계속 언급되어 왔다.

  약간 머리를 쓴 심리학 실험의 한 조건에 따른 작은 효과가 현대 진화 이론을 재편하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믿기 힘들 것이며, 사실 그렇게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후속 시험들은 이들 및 유사 ‘게임’에서 나타난 행동의 대부분을 [실험자들이] 상호성을 기대하거나 평판에 신경 썼다고 해석할 수 있음을 보였다.[14]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장 착취할 듯한 사람을 벌하고, 무임 승차를 가장 덜 해 보이는 파트너와 상호 교류하기를 선택하며, 평판이 문제가 될 때 협력과 처벌을 더 하면서 무임 승차를 줄인다. 사람들의 협력적 직관이 익명성이나 일회성 만남이라 확실하지 않은 세상에서 굳어져 왔다고 가정하면 순수한 이타주의의 어떤 다른 형태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실제 사회들에서 무임 승차자들을 처벌하는 데 처벌자에게 비용이 들 필요가 없음도 고려하라. 개인 또는 작은 집단이 사회적 기생충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그 재산에 방해 행위를 아주 낮은 비용으로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수고에 대해 감사, 존경, 자원 등으로 보답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경찰, 판사, 간수들은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집단 대 집단의 갈등의 역사에서 이타주의가 하는 역할로 돌아가자. 많은 집단 선택주의자들이 인간의 무장 투쟁이 곤충의 군인 카스트처럼 자기 희생이 진화하는 도가니였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자살 임무, 가미가제 공격, 죽음의 턱으로 돌격하기, 자발적 순교 정신의 다른 종류들이 오랜 동안 인간 갈등의 규칙이었던 것처럼 저술했다. 내가 조직된 폭력의 역사를 읽은 바로는 이는 그 경우에서 매우 멀다.

  비국가 사회 사이의 부족 전쟁에서, 남자들은 집단에게 이득이 되기 위해 치명적으로 높은 위험을 통상적으로 떠맡지 않는다. 부상자가 거의 없는 시끄러운 구경거리인 싸움을 벌이지만, 진짜 전투는 공격자들이 자신에게 최소한의 위험을 위해 숨어들어가 습격하거나 위장하여 행한다.[15] 공격이 치명적인 위험을 수반할 때, 그런 겁쟁이들에 대해 무자비하게 수치를 주거나 신체적으로 벌이 없다면, 포기하거나 뒤에 머물거나 싸움을 피하기 위해 변명거리를 찾는다(예를 들어, 사라 매튜 Sarah Mathew 와 로버트 보이드 Robert Boyd 가 투르카나 Turkana 족의 전쟁을 최근에 훌륭하게 연구한 것을 보라). [16]

  초기 국가들은 어떤가? 국가와 제국들은 큰 규모로 조직된 행동의 완벽한 사례며, 자주 자연적으로 선택된 집단의 사례로 [자랑스레] 예시된다. 그러나 최초의 복잡한 국가들은 자발적 협동이 아니라 무자비한 강압에 의존했다. 그들은 통상적으로 노예제, 인간 희생, 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가학적 처벌, 왕과 황제들이 처벌받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독재적 리더쉽, 산술적으로 많은 수의 남성들이 아내와 가족을 못 갖게 만들 필요가 있는 큰 하렘을 시행했다.

  현대 국가 사이의 경쟁도 이타적 협동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 16세기의 군사적 혁명까지, 유럽 국가들은 약탈적 폭력배, 사면된 죄인, 급료를 지불하는 용병들로 군대를 채우는 경향이 있었고, 반면 이슬람 국가들은 자주 군사적 노예 카스트를 부렸다.[18] 국가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최근의 현상으로, 징병, [국가] 교조주의, 무자비한 훈련을 힘없는 젊은이들에게 강제한 점점 더 관료화된 정부의 능력 덕에 가능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그랬듯이) 남자들이 열정적으로 군대에 자원했던 역사적 사례에서조차, 항상 빨리 이겨서 전투에서 죽을 위험이 낮으리라 기대하도록 만든 낙관적 환상의 희생자였다.[19] 일단 빨리 이길 것이란 환상이 깨지자, 전투를 개시하기 위해 냉정한 상관이 명령을 내리거나 ‘즉결 처분자(file closer)’들이 재촉하고(전진하지 않는 동료를 쏘도록 명령받았다) 수천 명에 의해 탈주하면 처형한다고 위협받아야 했다. 군대 계급 개미처럼, 집단의 이익을 위해 파멸적 운명을 향해 적극적으로 행진해 나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전쟁 기록들은 진정한 영웅주의 이야기를 포함한다 – 폭발할 수류탄 위에 군대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엎어진 격언에 등장할 만한(proverbial) 군인들 말이다. 하지만 은유를 주목해라. 군인의 의무에 대한 심리적 태도(mindset)를 연구하자, 그들이 명목적으로 싸우는 상위 집단(superordinate group)에 대한 충성보다는 개개 남성들의 작은 연합 내의 가상적 친족 유대감과 상호 의무에 훨씬 가까웠다. 작가 윌리엄 맨체스터(William Manchester)는 해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복무했던 것을 회상하며 소대원들에 대해 적기를, “사선에 선 그 남자들은 내 가족이자 집이었다… 그들은 내가 쓰러지게 하지 않았으며, 나도 그들에게 그럴 수 없었다… 전우들, 내가 지금 알았던 전우들은 국기나 국가, 해군 또는 다른 어떤 것의 영광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싸운다.”

  개인적 희생의 궁극이라 할 자살 공격은 어떤가? 군사의 역사는 이것이 쉽게 사용한 전술인 것처럼 아주 다르게 얘기를 전개할 것이고, 현대의 자살 테러리스트들을 연구하자 남자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데는 특별한 환경을 꾸며야 함을 알 수 있었다. 스코트 애트런(Scott Atran), 래리 스기야마(Larry Sugiyama), 발레리 허드슨(Valerie Hudson), 제시카 스턴(Jessica Stern), 브래들리 세이어(Bradley Thayer)는 정상적으로 아이를 가질 전망이 낮은 계층의 남자들 사이에서 자살 테러리스트들을 일반적으로 모집한다고 발표했으며, 그들은 또래 압력(peer pressure), 친척 관계의 환상, 친척들에게 갈 물질과 평판의 보상, 내세의 영원한 보상 이론(속담에는 72명의 처녀라고 한다)으로 세뇌(indoctrination)하는 등의 여러 가지에 끌리고 수가 늘어난다.[20] 이러한 조작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살하지 않으려는 강한 경향을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

  집단 전투가 개인의 이타주의를 선택한다는 생각을 더 자세히 봐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집단 대 집단의 경쟁에서 보상하고, 강제하고, 교육하는 것의 역사적인 중요성이 놀랍다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타적 개체의 집단이 이기적 개체의 집단을 꺾는다는 윌슨의 언명은 노예, 농노, 징병, 용병 제도를 ‘이타적’이라 분류할 때에만 진실이다. 조직된 개인의 집단이 이기적 개인의 집단을 꺾는다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그리고 집단 갈등에서 효과적인 조직화는 개인의 자발적 자기 희생보다 집단의 나머지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조작하는 데 더 유능한 개인이 이루어낼 듯하다.

  한 번 더 말하여, [선택] 수준을 바꿔서 집단 선택이 성공적인 국가들의 규율과 제도에 실제 작용한다고 말한다면 안 먹힐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높은 세율, 강한 정부, 유혹적 이데올로기, 효율적 군대를 가진 국가들이 이웃을 물리치며 팽창했다는 전통적인 역사가들의 설명에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딱 통상의 인과 관계로, 인간의 재능, 경험, 의사 소통의 결과로 가능해졌다. 고충실도 복제, 맹목적 돌연변이, 개체군에 자손이 미치는 작은 기여(differential contribution), 많은 세대 동안의 점진적 변화(iteration)란 진정한 다윈주의 기전들은 확정적인 유비(analogue)를 갖지 않는다.

  4. A Summary of the Trouble with Group Selection
  4. 집단 선택의 문제점 요약

  사람이 논박의 여지 없이 집단 생활에 적응했고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확실히 더 크며 오래 살고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집단 선택 개념은 피상적 호소력이 있다. 이 개념은 인간 집단의 특성, 또는 인간 마음의 특성들이 유전자에 작용하는 자연 선택과 유사한 과정으로 생겼다고 결론짓기 쉽게 만든다. 이 유혹에도 불구하고, 집단 선택의 개념이 심리학 또는 사회 과학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논해 왔다. 집단 선택은 매우 많은 것들을 참고하며, 대부분이 유전자 수준의 선택 이론의 대안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 진화에서 집단의 중요성에 대한 느슨한 암시를 준다. 그리고 그 개념을 더 정밀하게 할 때, 딜레마가 붕괴시킨다. 성공적인 집단의 문화적 특성을 설명하려 뜻할 때는, 전통적인 역사[학]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으며 자연 선택의 실제 기전을 정밀하지 않게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심리학을 설명하려는 의도라면 - 특히 친척이 아닌 집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라면 – 이론에서나 (자신과 그 친척을 보호하려는 내장된 이익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에서나 (인간이 그런 특질을 보인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 의심스럽다.

  이 중 어느 것도 사회와 도덕적 직관의 진화나, 대규모의 사회와 역사적 현상에 대해 개인의 심리학을 돌리려는 개체군과 네트워크의 동적 움직임(dynamics)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막지 않는다. 단지 ‘집단 선택’이란 말이 [진실을] 밝히기보다 훨씬 혼동시킨다는 것일 뿐인데, 특히 우리가 집단 생활에 진화적으로 적응한 문제를 보상하기 위해 인간의 인지가 고안해 온 아이디어와 단체들을 이해하려 시도할 때 그러하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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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이덕하 2013/04/01 06:26 # 답글

    유명한 진화론자들이 다 출동했군요.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집단 선택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언제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런지...
  • 漁夫 2013/04/01 21:36 #

    아마 저 같은 아마추어가 대결해 볼 일은 없을 문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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