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09 20:58

집단 선택(group selection) ; Steven Pinker의 비판 I Evolutionary theory

  많은 진화생물학 교양서에서 "처음 진화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집단 선택(group selection)이 정설이 아님을 알고 놀란다"는 말을 합니다.  이를 처음 비판했고 '거의 무덤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할 정도로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데 크게 공한한 사람은 George Williams입니다.
  그의 '적응과 자연선택(Adapation and natural selection; 1966)'은 실제 집단 선택이 불가능하다고 증명한 것이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그 영향력이 매우 미미할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가령 어느 종의 개체들이 모인 집단에서, 기근 때 자신이 발견한 먹이를 집단 전체에 나눠 주는 행동을 보이는 개체와 자기가 대뜸 먹어 버리는 행동의 개체 중 어느 편이 더 많은 자식을 남기겠습니까?   David Buss는 "종 내의 개인차에 작용하는 선택은 집단 수준에서 작용하는 선택의 힘을 약화시킨다"라 요약합니다.[1]

  하지만 근래에 (특히 인간 사회를 설명할 때) 특정한 종류의 집단 선택에 대한 설명을 원용하는 예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특히 David S. Wilson이 그 선두주자며, 이전에는 Williams와 William Hamilton의 입장에 거의 동의했던 Edward Wilson도 게임 이론가 Martin Nowak과 함께 이 쪽을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2] 
  Steven Pinker가 진화심리학의 주류 입장에서 최근 edge.org에 집단 선택을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저처럼 취미로 진화론을 보는 사람에게 꽤 흥미 있는 점이 많아서 옮겨 봅니다.  글이 꽤 길어서 둘로 나눕니다.  언제나처럼 그리 다듬지 않은 거친 번역임을 양해 바랍니다.

[1] D. Buss, 'Evolutionary Psychology'
[2] 전중환 교수님의 학회 감상도 있습니다(link, link 2).  이 link에서는 요점이 아주 쉽게 나타나 있습니다.



  { 아래 번역의 주에 대해서는 원문을 참고해 주십시오 }

  집단 선택의 잘못된 유혹(The false allure of group selection)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인간은 집단으로 살고, 그들의 집단의 행운에 영향을 받으며, 가끔 집단에 이익이 되도록 희생한다. 이것이 인간의 뇌가, 그 행동이 그 또는 그녀의 친족 및 그 자신의 안녕(welfare)에 해를 입힐 때라도, 다른 집단과 경쟁할 때 집단의 안녕을 증진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형태가 갖춰져 왔음을 의미하나? 만약 그렇다면, 유전자가 그 이론에서 행하는 역할과 유사한 “집단들”을 선택 단위로 지정하기 위해, 자연 선택 이론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매우 존경하는 몇몇 과학자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렇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조건에 대해 눈이 뜨이는 주장을 하기 위해 집단 선택 이론을 사용해 왔다.[1] 그들은 인간의 도덕성, 특히 기꺼이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을 집단 대 집단 경쟁에 대한 적응(adaptation)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E. O. 윌슨(Wilson)의 설명처럼, “한 집단 내에서, 이기적(selfish) 개체는 이타적(altruistic) 개체를 이긴다. 그러나, 이타적 개체의 집단은 이기적 개체의 집단을 이긴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여 집단 결속을 다질 수 있어서, 그들은 집단 선택이 종교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해 왔다. 그들은 진화가 공유지의 비극을 (집단적 행동의 딜레마 collective action dilemmas 나 공유 재화 게임 public goods games 으로도 알려져 있다) 해결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장치를 주었다고 제안하며, 이것에는 개인에게 이득이지만 사회(community)에 해를 줄 수 있는 행위가 있다; 친숙한 사례들은 물고기 남획, 고속도로 정체, 탈세, 탄소 방출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들은 규범적 도덕과 정치적 결정을 이들 과학적 믿음에서 끌어냈는데, 종교심, 애국심, 청교도주의처럼 보수적 가치들 뒤에 있는 지혜를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한다’는 개인주의에 대해 집단의 이익을 위한 공산주의자의 충성과 희생을 높이 사야 한다는 것 같은 점들이다.

  나는 새로운 집단 선택론자들에게 동의하냐고 질문을 자주 받는데, 아니라고 말하면 질문자들은 항상 놀란다. 결국, 집단 선택은 논리에 맞게 진화론을 확장하고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처럼 들린다. 또한, 집단 선택론자들은 승리를 선언하고 그들의 이론이 이미 좁은 환원론자의 선택이 유전자 수준에서만 작용한다는 교조를 능가한 것처럼 쓰는 경향이 있다. 이 에세이에서, 이 논리성이 환상이라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당신이 집단 선택에 대해 더 주의 깊게 생각할수록, 이는 논리에 덜 맞으며, 인간 심리학과 역사의 사실에 덜 적합하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나? 이것이 생명과 인간 본성의 진화에 대한 가장 뛰어난 과학적 이해와 관계가 매우 깊음을 보여 보겠다. 그리고 여기서 다양한 도덕과 정치적 색채에 대한 논쟁을 집어넣지 않더라도 (이들은 다른 곳에서 논의해 왔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종이 직면한 집단적 행동 문제를 가장 잘 다루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된다.

  집단 선택의 첫째 큰 문제는 용어 자체가 대단히 많은 혼동을 낳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개별적인 현상들을 참고할 때 그것을 떠올리는데, 부주의한(casual) 사용자들은 문자 그대로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를 수 있다. 나는 “집단 선택”이 집단으로 사는 유기체(organism)의 진화와, 인간의 전쟁과 같은 집단 사이의 경쟁에 대해 느슨한 동의어로 쓰이는 것을 보아 왔다. 가끔 이 용어는 불필요하게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된 개체의 특성에 대해 쓰이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언급한 것처럼, “사슴의 무리(a fleet herd of deer)”는 사실 단지 사슴의 무리일 뿐이다. 그리고 가끔 이 말은 통상적인 유전자 수준의 자연 선택 이론을 다른 단어로 다시 묘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쓰인다: 유전적으로 연관되거나 서로 협력하는 개체들의 부분집합들이 “집단”으로, 시간에 따른 그들의 유전자들의 빈도 변화가 “집단 선택”이라고 불린다.[2] 그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면 확실히 혼란스러우며, 글을 쓰면서 어떤 현상을 떠올리건 언급을 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집단 선택”의 의미가 자연 선택의 한 의미로 쓰이는 데 – 자연 선택이 개별 유기체에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를 최대화하기 위해 (다른 선택으로, 유전자에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 말하자면 다음 세대에 나타나는 사본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이 두 공식화를 동등하게 다루겠다) 집중하겠다. 현대에 집단 선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개별 유기체에 선택이 작용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더 높은 수준의 집합체(aggregates)에도 작용한다고 더하기를 희망할 뿐인데, 특히 유기체의 집단에도 말이다. 이런 이유로, 그 이론은 ‘집단 선택’보다는 오히려 ‘다층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 불린다. 이것은 모두 존경할 만치 전세계적이고 비환원주의적으로 들리지만, 내 논의는 다층 선택에도 적용될 것이다. 나는 자연 선택이 각 수준에 동등한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하면, 기층(bottom)에 유전자를, 프랙탈적 위계 구조의 맨 위에 유기체의 집단(특히, 인간 사회)을 앉혀 놓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먼저 집단 선택이 부족, 종교, 문화, 국가 같은 인간의 집단 특성을 상당히 잘 설명한다는 생각을 조사하겠다. 다음에 집단 선택이 개별 인간의 특색, 즉,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게 해 주는 직관과 정서를 설명해 준다는 것으로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집단 선택이 인간의 이타주의(altruism)를 설명하는 데 필요함을 보였다는 주장에 쓰인 경험적 현상들을 조사하겠다.

  1. 집단 선택; 집단의 특성들을 설명하는 요소

  자연 선택은 과학에서 이유를 밝히는 특별한 개념이며, 내가 보기에는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이 “누군가가 가질 수 있던 최고의 아이디어”로 지정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과학에서 가장 큰 신비들 중 하나인, 자연계의 설계란 환상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의 핵심은 복제자(replicator)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사본을 만들 때 (1) 그 숫자는 이상적 조건에서는 지수적으로 증가하고 (2) 필연적으로 유한한 자원을 위해 경쟁할 것이며 (3) 어떤 것은 임의의 복제 실수를 겪을 것이고(‘임의’는, 현재 환경에서 실수의 결과들을 예측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4) 복제 실수가 복제 속도를 빠르게 하는 어떤 것이라도 [복제] 계열에 쌓여 개체군에서 수적 우위를 점유(predominate; 우점)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복제의 여러 세대를 경과한 후, 복제자들은 효과적인 복제를 위한 설계의 외관을 보일 것이며, 실제적으로 그들은 그 효과로 성공적으로 복제하게 한 복제 실수들을 단지 축적해 왔을 뿐인데도 그렇다.

  이 이론에 대해 만족스러운 것은 바로 그 기계론적(mechanistic)인 점이다. 복제 실수(돌연변이)는 임의적이다(더 정확하게는, 그 결과에 대해 맹목적이다). 흥미 있는 결과는 유한한 개체군 내에서 복제되는 숫자다. 놀랄 만한 결과는 많은 세대의 복제로 나타나는 누적적 효과다. 복제 실수가 임의로 일어나지 않는다면(즉, 라마르크 Lamarck 가 맞았다면 한 유기체 내에서 변화들이 유기체가 필요를 느낀 것에 대응하여 일어나거나, 또는 창조론자들이 맞다면 최상위의 지성이 돌연변이가 그 유기체에 이익이 되도록 인도한다), 자연 선택은 쓸모없을 것이다 – 설계가 돌연변이 단계에서 나올 것이다. 만약 관심을 갖는 결과가 유한한 개체군 내에서 사본의 숫자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성공 기준 중 몇이라면(권력, 출중함, 영향력, 아름다움), 자연 선택은 기계적이 아닐 것이다: 개체군 내에서 변화의 동적 현상을 최초 상태에서부터 수학적으로 계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단일 세대에 일어났다면, 통상적인 물리적 원인과 결과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 선택은 진부할 것이다. 강물이 바닥의 무른 암석층을 깎아내고 뒤에 더 단단한 층을 남길 때나, 석유 안의 더 휘발성인 화합물이 덜 휘발성인 것보다 더 빨리 증발할 때, 자연 선택 이론을 떠올릴 필요는 거의 없다. 다른 것보다 어떤 것이 더 강하거나, 더 오래 지속하거나, 더 안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선택이 복제의 많은 세대에 작용하여 단일 현상(event)에 적용되는 원인과 결과에서 명백하지 않은 누적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때에만, 자연 선택의 개념이 무언가를 더해 준다.

  유전자들이 선택을 추동하는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 말하자면 자신을 고충실도(high-fidelity)로 복제함으로써 – 자연 선택은 유전자에 가장 잘 적용된다. 인정하는데, 원인과 결과의 세상에서 개체(그리고 그 친척)의 운명은 그 유전자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에, 개체들 수준에서 선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자주 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넘어 복제되고 따라서 선택 및 적응의 궁극적인 이점의 목표인 것은 유전자 자신이다. 유성 생식을 하는 유기체들은 자신을 문자 그대로 복제하지는 않는데, 그들의 자손이 클론(clone)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그 짝의 복합체(composite)기 때문이다. 유성 생식이건 무성 생식이건, 어떤 유기체도 살아 있을 때 획득한 특질을 자손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개체의 몸은 유전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세대를 걸쳐 전해지지 않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가 표현했듯이, “무엇보다 이 의미에서, 그건 가져갈 수 없다.”

  지금, 아무도 자연 선택 개념을 ‘소유할’ 수 없고, 그 용어의 사용을 경찰처럼 감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설명 능력은 너무나 현저하며 중요하여, 은유적, 시적(poetic), 희미한(fuzzy), 또는 그 기전의 진짜 의미가 사실 얼마나 심오한지를 희미하게 할 뿐인 암시적인 확장으로 희석시키면 안 되어 보인다.

  확실히 하기 위해, 유전자 외의 다른 복제자에 대해 자연 선택을 확장한 몇 경우는 엄밀하고 새로운 의미를 주는데, 그들이 복제자의 동적 변화의 본질적 측면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유전적 알고리듬(algorithm)에서 비트 코드(bits of code) – 인공 생명 시뮬레이션에서 유전자에 대응 – 및, 물리학자 리 스몰린(Lee Smolin)이 맞다면 모든 우주들의 법칙들과 상수들을 포함한다. [역자 주; ‘다중 우주 이론’]

  그러나 다른 확장들은 너무 시적이라 현상을 더 잘 볼 수 있게 하지 못하며 자연 선택의 진정한 힘을 불분명하게 할 뿐이다. 자연 선택의 장황한 표현을 써 통상의 인과 관계를 초점 없이 다시 설명하는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 도시들은 나무로 된 빌딩보다 돌로 지은 오래된 빌딩이 더 많은데, 이는 건축물 선택의 과정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동차에는 강철로 짠 타이어 코드(radial)가 폴리에스터(polyester) 코드보다 성능이 좋아서 타이어 선택의 과정에 의해 들어가 있다. 전화 선택에서 경쟁적 이점이 있기 때문에 터치톤(touch-tone) 전화가 다이알 전화(dial phone)를 능가하고 있다. 뭐 그렇고 그렇다. 확실하다 - 더 오래 가거나 더 효율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도와 주는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다른 것보다 더 오래 버티거나 경쟁에서 더 잘 한다. 그러나 복제자의 유한한 풀(pool)에서 임의의 실수를 곁들여 여러 번 복제를 반복할 때 그 특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연 선택 이론은 통상적 원인과 결과 외에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없다.

  집단에 대해선 어떤가? 집단이 어떤 조건들을 만족한다면 자연 선택을 정당하게 집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출아(budding) 또는 분열로 집단이 자신의 사본을 만들고, 집단들에 주는 비용과 이익 결과에 맹목적인 돌연변이들을 제외하면 자손 집단이 부모 집단의 (집단 내의 개체 성원들의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성을 충실히 재현하며, 집단의 초-개체 수(meta-population)에서 대표적 위치를 위해 다른 집단들과 경쟁한다면. 그러나 이것이 소위 ‘집단 선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에 모두 동의한다. 내가 보아 온 모든 경우에서, 자연 선택을 그리도 불가결하게 만들어 주는 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a) 유한한 개체군 내의(이 경우는 집단의 초-개체 수) 사본 수가 아니라, 크기, 영향력, 부, 힘, 수명, 영역, 또는 저명함과 같은 성공의 몇 유비(analogue)가 그 기준이다. 한 예가 일신교(monotheistic religion)들의 ‘성공’일 것이다. 일신교들이 다신교(polytheistic religion)들보다 더 잘 분열하는 경향이 있고, 결과적으로 지구상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종교들 중 수적으로 더 많은 일신교 체계가 있다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은 일신교들이 신도, 영역, 부, 힘, 영향력이 더 많은 데 있다. 이들은 인간 관찰자에게는 인상적이지만, 선택이 - 문자 그대로 - 야기한 것이 아니다.

(b) 돌연변이가 임의적이 아니다. 정복자, 지도자, 엘리트, 이상주의자, 사회 기업가, 다른 혁신가들이 필요를 느낀 데 (한 예로, 라이벌에 대해 집단이 우위에 서도록 지도함) 대응하여 지적으로 설계한 전술(tactic), 체제, 규율과 믿음을 계산하기 위해 고도로 비임의적인 두뇌를 사용한다.

(c) ‘성공’은 대상 그 자체에 적용되며, 자손의 계열(chain) 끝에 있는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다. 고대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로마 제국이었지, 거기서 갈라져 나온 집단, 두세 가지 임의의 변화를 제외하면 원래의 로마 제국과 매우 닮은 아기 로마 제국, 결국 다른 것들을 수적으로 능가한 자손 제국의 계열이 아니다.

 
  이들 차이점의 맨 위에, 집단 선택론자들이 설명하려 하는 대부분의 집단적 특질은 유전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이다. 이 특질은 그 집단이 넓은 지리적 분포를 갖도록 이끄는 분산하는 개인의 유전적 성향 또는 그 종이 대멸종 사건을 살아남도록 하는 가혹한(stressful) 환경을 버티는 개인의 특성과 같이, 그 집단에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위쪽으로 전파되는(propagate upward) 효과를 갖는 몇 유전자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신, 종교적 믿음, 사회적 규칙, 정치적 조직 형태 같은 문화적으로 전파되는 특질들이다. 현대 집단 선택론자들은 그들이 논의하고 있는 것이 문화적 특질이라고, 또는 심지어 참고하고 있는 특질이 유전적인지 문화적인지에 대해 알 수 없다고까지 자주 명시적으로 밝힌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많은 집단 선택의 옹호자가 상기시키는 것처럼, 소위 집단 선택은, 유전적 알고리즘 또는 인공 생명 시뮬레이션에서, 말하자면, 그대로 (정확하게) 적용하는 자연 선택 이론을, 정확하지 않게 도입한 것이다. 대신 그것은 타이어나 전화 종류 사이의 투쟁에 더 비슷한 느슨한 은유다. 이 이유 때문에 ‘집단 선택’이란 단어는 우리가 항상 ‘역사’라고 부르는 것에 더해 주는 것이 거의 없다. 확실히, 몇 문화는 그것을 인구, 힘, 또는 확산이 더 크게 해 주는 것이 있으며, 이에는 팽창주의 이데올로기, 적대자 개종시키기, 효율적 군사 전략, 치명적 무기, 안정적 정부, 사회 자본, 법의 통치, 부족 충성 규칙이 들어간다. 하지만 몇 집단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인구가 많거나, 더 부유하거나, 더 강력하거나, 더 넓은 지역을 정복하도록 하는 특질을 갖는 역사가의 공통된 의견에 ‘자연 선택’이 무엇을 더하는가?

  2. 집단 선택; 개인의 특질에 대한 설명

  개인의 특질로 돌아가자. 부족주의(tribalism), 용기, 자기 희생, 외국인 혐오(xenophobia), 종교, 공감, 도덕주의적 정서와 같은 집단 생활에 적응된 심리적 특질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집단 선택이 필요한가? 

  인간의 번식 성공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부분적으로 그 집단의 운명에 달려 있다. 한 집단이 절멸되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유전자와 함께 절멸된다. 한 집단이 영역, 음식, 또는 짝(mate)을 획득하면, 뜻밖의 황제가 그 구성원의 전부 또는 부분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사슴의 무리(fleet herd of deer)와 사슴 떼의 무리(herd of fleet deer)를 기억하라. 한 사람이 그 집단의 복지에 헌신하고 그 결과로 자신의 복지에 기여하도록 촉진하는 내적 특질을 갖는다면, 집단 선택은 불필요하다; 집단 생활의 맥락에서 개인 선택[을 보는 것]이 적당하다. 개별 인간의 특질들은, 밤-낮 주기, 포식자, 병원체, 유실수(fruiting tree)를 포함하는 환경 내에서 다른 인간들이 진화한 것과 똑같이, 다른 인간들을 포함하는 환경에서 진화했다. 

  ‘집단 선택’의 몇 수학적 모형(model)은 사실 집단의 맥락에서 개체 선택과 꼭 같다. 모형을 수립한 사람은 집단의 운명에서 개인에게 붙는 적합도의 배당금을 ‘개체 적합도’로 셈하지 않는다고 임의로 명문화한다. 그러나 ‘집단을 이롭게 한 덕분에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과 ‘집단의 나머지를 비용 삼아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 사이의 저울질(tradeoff)은 유전자 수준의 선택에 들어가는 많은 저울질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것들 것 번식적 대 신체(somatic)적 노력, 짝짓기 대 양육, 현재 대 미래의 자손 [갖기] 등을 포함한다. 모든 경우에 새로운 ‘선택 수준’으로 자연 선택 이론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사람이 집단에게 이득이 되지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특질을 보일 때만이 집단 선택이 뭔가 더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아주 친숙한 문제, 즉 대부분의 진화 생물학자들이 집단 선택을 1960년대에 거절하게 한 문제로 인도한다.[4] 그 성원들이 아기를 갖는 속도보다 집단이 새 집단을 싹틔워 내보내는 속도가 더 빠른,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경험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환경을 제외하면, 생명과 사지를 위험하게 하는 어떠한 유전적 경향도 가차 없이 선택으로 떨어져 나간다. 이 효과를 갖는 새로운 돌연변이는 개체군 내에서 우점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랬다 하더라도 집단을 희생시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이주 개체나 돌연변이가 몰아낼 것이다. 

  집단적 공격성(collective aggresion)의 확실한 사례를 취해 보자. 자신과 집단에 대한 이익이 자주 일치할 수 있다. 한 전사(warrior)는 공격자 무리를 겁주어 쫓아내어 그 자신과 가족의 목숨과 함께 동료인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이익이 갈라질 수 있다; 그 전사가 뒤에 남아 있거나 옆으로 새어나갈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싸우도록 놓아 둘 수 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결과는 불확실하지만, 선택이 확률에 작용하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들로 - 말하자면 1/2의 가능성으로 두셋의 아내를 더 납치해 올 기회를 약속하는 습격에서 죽을 1/10 기회를 감수하고 - 행동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저울질이 있는 조건에서, 우리는 선택이 그 개체의 예상 번식 결과를 최대화하는 특질을 선호한다고 기대해야 한다.

  우리가 볼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것은 개체들 사이에서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기대하는 이익을 예측 가능하게 희생하는 – 갤리선 노예, 인간 방패, 또는 포탄 희생자(cannon fodder)로 기꺼이 자원하는 봉사 같은 - 내적인 경향의 진화다. 그의 집단이 적에 대해 우위를 갖도록 한 사람이 자살 공격을 시도하게 추진하는 극단적인 유전자의 경우를 보자. 이는 거의 선택될 수 없는 유전자다! (그 자살 전사의 친척들에게 가는 잠재적 이익에 대해서는 지금 제껴 놓을 것이다) 대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살 공격자가 되도록 조작하는 경향이며, 더 일반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집단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전력으로 적용하려 하는 도덕과 자기 희생 규칙을 선포하는 경향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조작이나 강제에 운없게 희생되면, 우리가 그 시야에 들어오는 큰 실수로 포식자를 이롭게 하는 희생자 동물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필요 이상으로 그것을 이타주의라고 부르거나 진화적 설명을 찾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집단을 이롭게 하는 자기 희생의 어떤 사례에 대해서도 경쟁하는 경험적 예측의 훌륭한 집합들이 있다. 인간이 자신을 비용으로 하며 집단을 이롭게 선택되었다면, 자기 희생 행동이 리비도(libido), 단맛 선호, 또는 부모의 사랑 같은 다른 적응과 꼭 같이 의도적, 자발적이고, 보상이 필요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집단 생활의 맥락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집단에도 이롭도록) 자신이나 친족을 이롭게 하도록 선택되었다면, 어떠한 보장된 자기 희생이라도 노예화, 징병, 외부의 인센티브, 또는 심리적 조작과 같은 다른 사람의 조작의 결과여야 한다.

  확실히, 특히 문화적인 집단 특질에 대한 설명으로서 집단 선택으로 돌아간다면, 자살 공격을 실행하는 구성원을 새로 얻도록 성공적으로 강제하거나 조작하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떻게 더 팽창할 수 있는지 알기는 쉽다. 그러나 이는 그 구성원에게 유전된 심리학과는 상관이 없으며, 이 경우에는 조작 없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그들의 의지다. 이보다 덜 극단적인 희생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성립한다.

  == 2편에 계속됩니다.  문장이 쉽지 않아 좀 시간은 걸릴 예정입니다만 ==

  漁夫

핑백

  • 漁夫의 'Questo e quella'; Juvenile delinquency : Price equation; 의미 2013-07-07 22:18:25 #

    ... 취하건, 특정 집단에 적용하건 결과는 동등합니다. 참고로, 제가 집단 선택(group selection)을 반박한 Steven Pinker의 에세이를 번역(1, 2)했었는데, 아직 논란이 되는 이유 중 하나도 수학적으로는 어느 편 접근을 선택하건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집단 선택적 설명을 거의 몰아냈던 George W ... more

덧글

  • 몽몽이 2013/03/09 23:59 # 답글

    3가지 예를 든 문장이 가장 어렵군요. 원글을 쓴 사람이 과히 문장력이 좋지 못한 듯.
  • 漁夫 2013/03/10 00:20 #

    포스팅 안에도 넣어 놓았습니다만, 원문은 http://edge.org/conversation/the-false-allure-of-group-selection 입니다.

    (a) The criterion of success is not the number of copies in a finite population (in this case, the meta-population of groups), but some analogue of success like size, influence, wealth, power, longevity, territory, or preeminence. An example would be the "success" of monotheistic religions. No one claims that monotheistic religions are more fission-prone than polytheistic ones, and that as a consequence there are numerically more monotheistic belief systems among the thousands found on earth. Rather, the "success" consists of monotheistic religions having more people, territory, wealth, might, and influence. These are impressive to a human observer, but they are not what selection, literally interpreted, brings about.

    (b) The mutations are not random. Conquerors, leaders, elites, visionaries, social entrepreneurs, and other innovators use their highly nonrandom brains to figure out tactics and institutions and norms and beliefs that are intelligently designed in response to a felt need (for example, to get their group to predominate over their rivals).

    (c) The "success" applies to the entity itself, not to an entity at the end of a chain of descendants. It was the Roman Empire that took over most of the ancient world, not a group that splintered off from a group that splintered off from a group that splintered off from the Roman Empire, each baby Roman Empire very much like the parent Roman Empire except for a few random alterations, and the branch of progeny empires eventually outnumbering the others.

    제가 번역 실력이 결코 좋지 못하기 때문에 매끄럽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 감사 2013/06/06 16:37 # 삭제 답글

    그래도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 漁夫 2013/06/07 00: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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