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붉은털원숭이 이야기
Judith Rich Harris는 '개성의 탄생'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젖도 안 뗀 붉은털원숭이 새끼들을 양어미의 손에서 키운 '교차 입양(cross-fostering)' 실험을 설명했다.... 나쁜 어미의 손에 자란 예민한 (혈통의) 원숭이는 스트레스를 다루지 못하는 사회적 낙오자가 되었지만 좋은 어미의 손에서 자란 원숭이는 썩 잘 해나갔다. 좋은 어미가 미치는 영향은 새끼들이 양어미와 떨어져 또래들과 한 우리에서 지내고 난 뒤에도 지속되었다."
'개성의 탄생'에서 Harris가 주장한 것과 이 내용은 명확히 상충된다. Harris는 실험 세부 사항에 대해 여러 사람을 통해 Suomi에게 꾸준히 질문했으나 전혀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했으며, 그의 실험은 세부를 더 자세히 밝히고 입양 마리수를 늘린 다른 연구자가 더 긴 기간 재현해 보았으나 같은 결론을 얻지 못했다. 한 마디로 후속 연구에서 일치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 그 후의 이야기 ]
수오미의 교차 입양 실험이 최근(2006년 당시) 신경과학자 스티븐 쿼츠와 티렌스 세지노브스키의 '거짓말쟁이, 연인, 그리고 영웅(Liars, Lovers, and Heroes)'이라는 책에 등장했다. "..... 수오미는 이 (교차 입양) 연구결과를 근거로 '우리 연구는 특정한 유형의 조기 경험을 통해 이러한 (성격 기질의) 경향을 상당히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발표했다."
수오미의 실험에 대해서도, 인용에 대해서도 주에 어떤 참고문헌도 소개되어 있지 않은 탓에 나는 저자들에게 메일을 보내 출처를 부탁했다. 테리 세지노브스키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는 실험의 절차와 결과에 대한 설명은 몇 년 전 그 국립연구소에서 그의 강연을 들어 안 것이며, 그 인용문은 1997년 '디스커버(Discover)'에 실린 기사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기사를 찾았다. 수오미가 앞에서 한 말은 교차 입양 실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또래들 틈에서 자란 원숭이와 어미 품에서 자란 원숭이를 대조하여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사의 뒷부분을 보면 '디스커버'의 기자가 교차 입양 실험을 언급하기는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은 생략)
'디스커버'의 기자는 '새끼를 애지중지 보살피는 어미'는 내성적인 원숭이를 이렇게 바꿔 놓지만, 내성적인 아이는 오히려 정반대로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또한 두 가지 연구 모두 불충분한 기간[1] 동안 소규모의 표본만을 대상으로 하여 얻어 낸 결과라는 것도, 그리고 이들 예비보고서 이후로 여러 해가 흘렀지만 두 연구 가운데 어느 것도 동료들의 심판대에 오르는 저널에는 실리지 않았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았다.
[ Judy's comment ]
좋은 이야기는, 특히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바를 확인시켜 주는 이야기는 자체의 생명력을 얻는다. 일단 속설로 굳어져 버리고 난 다음에 이를 반박하려면 상당히 거센 저항에 부딪친다. 이러한 통념들이 자리 잡는 방식은 이러하다.... 이 이야기들은 기자들의 손을 거쳐 조금 윤색되어 '디스커버'의 기사니 '뉴스위크'의 표지 기사니 하는 식으로 대중매체로 흘러 들어간다. 그런 다음 다른 작가들에 의해 한층 더 윤색되어 되풀이된다. 어디서 들었는지, 어디서 읽었는지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내용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냥 아는 것인 셈이다.
- 'No two alike(개성의 탄생)', Judith R. Harris, 동녘사이언스 刊, p. 96~116(발췌 정리)
[1] 수오미의 연구는 15개월 동안 관찰했지만, 후속 연구자의 3년 간의 관찰에서는 결과가 달라진 것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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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 O. W.
알 만한 분들은 다 아는 논쟁이지요.
인간 사회는 극도로 복잡한 수준까지 번영했다. 그 구성원들은, 고도의 분업을 이룰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역할을 전환할 수 있는 지능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줄 아는 재능 있는 배우이다...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공격성이 억제되었고 영장류에게 어울리는 낡은 지배 형식이 복잡한 사회적 기술로 대체되었다....
이 글의 저자는 Edward O. Wilson 입니다.
역사적인 '사회생물학(Sociobiology)'에서 인간에 관한 29페이지 분량의 한 장에 등장합니다.
그의 동료 교수들이 낸 반론의 한 구절은
그의 책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는, 환경의 영향(예를 들어, 문화 전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뿐 아니라, 연구자의 개인적,사회적,계급적 편견을 무시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 그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편에 서서,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는 방식으로 기존의 사회적 제도를 지지하고 있다.
- 성명서 '반(反) 사회생물학', S. J. Gould, Richard Lewontin 등
'사회 생물학'의 마지막 장에는 비판할 만한 내용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반 사회 생물학' 파의 비판은 명백한 오류이다... 윌슨이 개인적 편견 때문에 인종 차별, 성 차별, 불평등, 노예제, 집단 학살을 옹호한다는 비난은 특히 부당하고 무책임했다. 윌슨을 비방하고 괴롭힌 사람들은 그 책이 아니라 성명서를 읽은 사람들이었다. ('The blank slate')
[ Matt's comment ]
윌슨은 다윈이 마주했던, 바로 그 상처받은 자존심에 부딪혔다. ('Nature via nurture')
교훈 2. 제대로 비판하려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해라.
교훈 3. 감정에 따르면 제대로 비판이 될 리 만무하다.
{ source ; 'The blank slate(빈 서판)', Steven Pinker, 김한영 역, 사이언스북스 刊, p. 202~04 발췌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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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 다음 내용은 漁夫가 뭐라 할 만치 잘 알지는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대부분 인용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보시겠습니까?
일화 1.
1997년 저를 포함한 몇 사람의 연구인들이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원 자료에 기초하여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 1997)라는 연구서를 출간하였습니다. 이후 이전과 같은 난폭한 수탈설은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교과서의 서술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군요. 한번 만들어진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선진사회라면 그러한 일이 있기 곤란합니다. 거기서는 학술세계를 지배하는 엄격한 심판인 그룹이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해 거역할 수 없는 판정을 내립니다. 그에 비해 후진사회는 엄격한 심판인 그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뭐가 옳고 그른지를 대중은 물론 연구인조차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대중의 집단기억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지요. 한번 권력화한 대중의 집단기억은 좀처런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 by 이영훈, http://heloo.egloos.com/3829357
위안이라면 Judy's comment에서 보듯이 선진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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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2.
그래서 한번은 그쪽에 밝은 양반 하나를 만나 이영훈 교수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했다는 입장을 가진 건 사실이지. 그런데 문제는 이걸 뒤집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이 교수도 처음부터 그런 입장을 가졌던 게 아니거든. 이 교수는 그냥 그 시대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데, 공부하면 할수록 실제 데이타하고 기존 연구 성과들이 삑사리 난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래서 모든 자료를 하나하나 검증해 나가기 시작했고, 몇 년이나 그 작업을 한 끝에 결론을 내린 거야. 지금 그쪽 학계에서 이 교수가 쌓아놓은 데이타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걸? 대개 말로 뭘하긴 쉬운데 발로 뛰어서 데이타를 만드는 건 쉽지 않으니까. 입만 산 놈들이 너무 많아.
내가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하기도 어려운데(들은 지 몇달 됐다), 대강 대의는 맞을 것이다.
- http://orumi.egloos.com/3230848
(漁夫의) 공돌이 마인드로 보면, 누가 옳은 소리를 하는지는 데이터의 양과 질로 판가름나는 거 아니었나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논박하려면 그의 주장의 헛점을 밝혀 내거나, 더 질이 좋은 데이터를 들고 오면 될 일입니다. 그 외에는 결정적이라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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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by Fischer
漁夫 생각에는, '근대화'라는 단어의 뜻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근대화라는 단어는 여기서는 맥락상 주로 전근대 국가의 특징이 근대 국가의 (현대적) 특징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근대화'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누구를 위한 근대화입니까? 당시 구조선 사람들? 일본?
일반적으로 말해 평화는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핵심적인 질문은 이렇다. 누구를 위해 좋은 것일까?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로마인들에게는 축복임에 틀림없었겠지만 로마 제국의 속국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까? 모든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는 평화를 원한다...
영국의 주간지 '옵저버(Observer)'의 전 편집장인 코너 크루즈 오브라이언(Conor Cruise O'Brien)은 1950년대 유엔에 제출한 한 결의안 초안을 두고 달라이 라마의 한 티베트인 참사관에게 승인을 요청한 일화를 들려준 바 있다. 초안에는 '승리(victory)'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참사관은 티베트인은 평화의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처럼 끔찍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오브라이언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싸움을 하는지,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면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다. 그러자 참사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아주 훌륭한 최고의 평화(very excellent best peace)라고 부릅니다."
- 'Peacemaking among primates(영장류의 평화 만들기)', Frans de Waal, 김희정 역, 새물결 刊, p.38~39
이 문단에서 '평화'를 '근대화'로 바꾸면 어떨까요? 漁夫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크게 어긋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영훈 교수도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
- http://heloo.egloos.com/3829692
이 테마를 갖고 http://hvanb756.egloos.com/3340090 여기처럼 예의바르게 충분히 토론도 가능합니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논의가 다 그렇듯이 언쟁도 오고갈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무래도 적절한 근거를 더 많이 갖고 있는 편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漁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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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말이 나왔으니 사견을 좀 얘기하지요. 개인적으로 일제 이전 구 조선 말기에 한반도에 민주주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대한 제국이 입헌 군주국을 계획하고 있었는지요? 국권 상실 전까지는 전제군주국 아니었습니까? '근대성'이 '항상 민주주의와 같이 온다'는 데는 전 좀 회의적이라서 말이지요. 민주주의가 오지 않았다고 근대화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heloo.egloos.com의 일련의 포스팅을 보면 1946년에 일제가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주려고 했다는 얘기를 이 교수가 합니다. 일본이 만약 이것을 1920년대부터 했다면... -.-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다행이지요. 지금 일본어 안 써도 되니...
"창씨개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특히 그 시대 책을 볼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혹시 볼 일이 생기면 반드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_ _)
감정적인 문제과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대중과 논의하면 안되겠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나날이었습니다, 요즘^^; 상대의 교육정도나 친분관계도 무시되고, 데이타를 들이밀어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아 공포스러웠어요.
그나저나 어부님 이런 글 올리시면 초토화될지도 모릅니다.
좀 공포스러운 일인데, 전 한의학과 천안함 문제로 적게나마 경험해서 면역..... (그거 하나도 좋지 않잖아.... -.-)
'대중'이라는 집단은 한 번 '선동'되면, 다른 사실은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듯 합니다.
항상 기본적 예의를 지키면서 토론은 잘 안 되는성 싶습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주장이 무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근대화'가 가지는 긍정적인 뉘앙스외에는 없는 듯 합니다.
이건 흡사 한의학이 '과학'이라는 주장이 되풀이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과학'이 가지는 긍정적인 뉘앙스때문이라는 점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네요.
어찌됐든 우리 사회가 선진화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 들게 하는 논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런 문제는 Judy's comment처럼 미국에서도 흔하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일까요.
http://www.slate.com/id/5853
어부님의 이 포스팅의 의도는 저는 십분 이해하고 완벽하게 동의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순수 과학이나 공학의 연구와는 달리,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의 연구에서 통계의 처리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도 데이터를 좀 만져봐서 아는데, 똑같은 data set를 가지고 어떻게 operate 하는냐에 따라서 정 반대의 결론을 도출한다는 건 정말 식은 죽 먹기입니다. 물론 이건 study design의 결함에 대부분 의거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분야에서 엄밀한 - 특히 in vitro에 가까운 여러 confounding factor를 통제한 - study design 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회 과학에서는 더 심하면 심했지, 그보다 나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드시 통계와 데이타가 쌓여 있는 연구라고 해서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데로 대중의 모호한 통념을 따른다는 건 더 무서운 일이긴 하지요.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저는 James Surowiecki의 [The Wisdom of Crowds]를 좋아하고 그가 제시하는 일련의 예들과 실험들이 마음에 듭니다. 여기에 의하면 일반 과학자들의 '통념'과 달리 그다지 정보도 많아 보이지 않고 데이터도 없는 대중들이 의외로 올바른 의사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명쾌하면서도 합리적인 설명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면 한국의 부모들이라면 Harris의 이론을 '역시 또래 집단이 중요하다니 우리 애는 유치원부터 좀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최고로 좋은 데로 보내야...그래야 제대로 된 애들이랑 어울리겠지' 뭐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다분하다는 걸 생각하니 이건 좀 다시 안습이긴 합니다. .OTL
1. James Surowiecki의 [The Wisdom of Crowds] 혹시 위 서적의 번역본이 국내에 있나요? 평소 흥미있던 주제라 한 번 쯤 읽어보고 싶네요.
2. 우리 애는 유치원부터 좀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최고로 좋은 데로 보내야...그래야 제대로 된 애들이랑 어울리겠지'
=> 아직 양육가설을 다 읽지는 못하였지만, 사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해리스의 주장을 접하기 전까지는 저는 어릴 때 또래집단과 사이가 안 좋아서 별 영향을 안 받은 탓에 어디를 다니는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찌됐든 그렇다면 해리스의 집단 사회화 가설을 받아들이는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ll / 아래 리플에 대한 답과 합쳐서 그냥 독립 포스팅으로 만들겠습니다. :-)
가령 어부님이 지지하시는 진화 심리학의 경우에도 저 역시 대부분의 경우는 그 연구 성과들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이것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고, 그에 반대되는 결과를 도출하는 연구들도 계속 나옵니다. 물론 진화론적 입장은 '현재로서는' 창조론 (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서도) 보다는 나은 모델이지만 역시 완벽한 이론 체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복잡한 인간 사회에 적용시키기에는 말이죠. 특히 정책 입안 등에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것인가 - 어느 포스팅에선가 어부님이 이렇게 주장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 는 정말정말 신중하게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 사회는 실험실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죠...
다시 한 번 긴 덧글 죄송합니다. ;;;
문제는 이영훈 교수가 '돈을 준 쪽'과 '연구 성과의 방향'을 분명히 분리하는 발언을 하는가일 텐데, 쌍동이 연구의 권위자 T. Bouchard 교수는 그 점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거든요(돈을 준 재단이 우생학을 지지한댑니다 OxzTL). 이영훈 교수가 아직 그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면, 만슈타인님처럼 우려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겁니다.
ps.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대개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하면 '근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근대화'는 일반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비판 이전에 비난이 가해지지요. 반면 위에 <수탈의 메커니즘>에서 묘사된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것은 근래에 이글루스에서 벌어진 논쟁과는 관련이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논쟁과 별개로 포스트 내용이 재미있는 관점을 다루고 있군요. 좋은 포스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