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0 13:36

사출기 돌리던 포닭 직업 얘기

 A tribute to '젤 돌리던 포닭' by byontae-sama.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 소시적 석사과정 시절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할 때다. 무더운 8월 초였다고 기억한다.  학교 도서관 갔다 들를 수 있는 건물에, 플라스틱 UTM성형 시편을 - 흔히들 개뼉다귀(dog bone)라고 하는 - 만들어 주는 semi-open lab에 들렀다.  마침 이 lab의 경험자로, 사출기를 돌리는 대빵 포닭이 있었다. 보통 사출은 노가다 취급하기 땜에 석사과정 초짜가 돌리는데 이건 좀 예외적이다.  시편을 하나 가지고 가려고 마침 갖고 있던 pellet을 갖고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예약 없이 가긴 했지만) '댓가'가 굉장히 비쌌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어요?"

  했더니,

  "시편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싫거든 다른 데 가 사출해요."

  대단히 무뚝뚝한 포닭이었다.  더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만들어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pellet을 건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빨리 동작을 하다가, 저물도록 건조되는 시간을 평상보다 훨씬 넘게 끌고, 정작 사출기를 돌릴 땐 시편을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시편을 만들고 버리고를 반복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UTM 예약해 놓은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만들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사출기하고 resin 온도가 오를 만큼 올라야 시편이 제대로 되지, 온도 낮은데 재촉한다고 제대로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갖고 갈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한다는 말이오?  외고집이시구먼. 시간이 없다니까요."

  포닭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해요.  pellet이야 몇 백 kg 단위로 있을 거 아닙니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UTM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만들다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만들던 사출 과정을 숫제 자동으로 바꾸더니 태연스럽게 담배를 피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나온 시편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맨 마지막에 나온 십수 개를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최소 백 개는 쌓여있던 시편이다.
  UTM 예약시간을 놓치고 두 주일 기다려야 해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사출을 해 가지고 실험이 제 시간에 될 턱이 없다. 랩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논문 번역만 무척 시킨다.  랩도덕(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포닭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포닭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사출기에 PE를 넣어 purging하고 있다.  그 때, 바라보고 서 있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과학도공돌이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다크 서클과 원형탈모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포닭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랩에 와서 시편을 내놨더니 교수님은 제대로이쁘게 만들어졌다고 야단이다.  보통 수준의 시편보다 정말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늘상 보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니, 부분적으로 허옇게 되어 있으면 그 부분이 안 늘어나기 때문에 strain-stress curve 모양이 어긋나 탄성률 계산이 어렵고, 건조가 잘 안 돼 기포가 있으면 갑자기 깨진다는 것이다. 시편 사이의 크기 차이도 거의 없이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포닭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중략)

  이 시편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포닭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실험을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사람이 포닭->통닭 테크나 타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데이터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포닭을 찾아가서 맥주에 통닭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금요일에 도서관 가는 길로 그 포닭을 찾았다. 그러나 그 포닭이 앉았던 랩에 포닭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포닭이 있던 사출기 앞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학교 담장 밖 건물의 통닭집을 바라보았다. 아, 그 때 그 포닭이 저 통닭집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시편을 만들다 피곤한지 자동으로 바꾸고 담배를 피던 포닭의 쓸쓸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injection molding cycle의 과정인 '건조 - 용융 - 사출 - 냉각 - 방출'을 되뇌었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학부생이 시편을 만들고 있었다. 전에 얇은 dog bone을 만드느라 punch를 만들거나 커터로 일일이 틀을 대어 긋던 생각이 난다.  사실 시편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게다가 요새는 사출기가 매우 좋아져서 동작 도중에 mold가 닫히는 소리도 거의 들을 수가 없을 정도다.  규칙적으로 '내가 돌아간다'고 알리며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사출기를 돌리던 포닭의 모습이 떠오른다.

  漁夫

  cf. 요즘의
대형 사출기 작동 영상, 또 하나.
     사출이 제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진품과 유사품; plastic 사출 문제를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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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use 2008/08/20 16:00 # 답글

    오 모든 회의주의자들을 지켜주시는 지름신이시여(...)
    저는 전공상 변태님이 이미 커버한 영역이어서 제가 패러디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어부 2008/08/20 18:07 #

    트랙백 패러디 놀이가 어떨까 합니다. 아쉽게도 muse님은 선점당하셔서..........
  • Alias 2008/08/20 16:28 # 답글

    역시 제일 인상적인건 포닭 --> 통닭 테크트리...-_-;

    근데 통닭 떡밥은 원래 프로그래밍 업계에서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프로그래머는 30대 중반 이전에 관리직으로 가든 짤리든 둘 중 하나니까 프로그래머의 성공은 진급이 아니라 일하는 동안 "통닭튀길 자본금"을 마련하는 데에 좌우된다는 식의 자조적 표현.
  • 어부 2008/08/20 18:08 #

    통닭이 그 얘기였군요.... =.=

    물리 쪽 패러디는 어떻게 될까요? 이론물리 simulation iteration? 아니면 실험물리 쪽에서 무엇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
  • Alias 2008/08/20 18:33 #

    실험물리 쪽이라면 아무래도 진공개스킷 (전문업체에 위탁하는 경우도 있지만 청계천(청계천 재정비하기 전)에 가서 깎아오는 경우도 흔했죠) 쪽이 저런 패러디에 적합할 테죠. 이론물리는 그 특성상 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필력이 딸려서 못 쓸 거 같군요...=_=
  • 어부 2008/08/20 18:43 #

    하하 그 패러디라면 저도 쓸 수 있습니다. 제 전공 실험이 vacuum chamber를 필요로 했거든요 =.=
  • byontae 2008/08/20 17:23 # 답글

    역시 어디가나 공돌이 사는건 비슷하군요(......................orz)
  • 어부 2008/08/20 18:08 #

    공돌이들이 분야 달라 봐야 공돌이죠.... orz
  • 길 잃은 어린양 2008/08/20 21:48 # 삭제 답글

    아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필력!!! 진정한 해학의 달인이십니다.
  • 어부 2008/08/20 21:57 #

    감사합니다만, 공은 byontae님의 original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 그런데 공돌이 삶이 어디나 비슷하게 퍽퍽한 게 정말.....
  • Leonardo 2008/08/20 22:04 # 답글

    재밌습니다.
  • 어부 2008/08/20 22:14 #

    감사합니다. Leonardo님도 트랙백 놀이에 가담하시면 어떨까요 @.^
  • Ha-1 2008/08/20 22:57 # 답글

    최곱니다 ㅠ.ㅜ b

    정진정명하여 '학교 밖'버전을 쓰도록 노력을.. oTL;;
  • 어부 2008/08/20 23:25 #

    뭐니뭐니해도 byontae님의 original이 끝내줬죠. Ha-1 님께서도 트랙백 놀이에 참여를? ^^
  • Ya펭귄 2008/08/21 01:04 # 답글

    균질도, 캐비티....
  • 어부 2008/08/21 01:06 #

    :^D uniformity, void, crystallization haze... ^^
  • phice 2008/08/21 12:20 # 답글

    트랙백들 돌아가면서 읽다보니 오늘하루가 매우 즐겁게 마감되는군요
    그러나 제 블록에는 이 종류의 트랙백은 못하므로 구경만 겔겔.
  • 어부 2008/08/21 13:10 #

    안녕하십니까 ^^

    음... 사진 필름 현상 쪽은 어떠씰까요. '디카가 되면서 현상액 냄새도 추억으로 남았다' 요러코롬....
  • phice 2008/08/24 01:04 # 답글

    저도 대세에 동참했습니다 읽는 사람이야 어떻든 쓰는건 참 재미있군요.
  • 어부 2008/08/24 13:44 #

    하하 역시 하나 만들어 주셨군요. ^^ 잘 읽었습니다. 필카에서는 말씀하신 '만드는 맛'이 또 있는가 보군요.
  • S 2008/09/27 08:14 # 삭제 답글

    아직까지도 맨날 프리폼 만드는 넘도 있다 -_-
  • 어부 2008/09/27 11:55 #

    그게 네가 택한 거 아니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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