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3 23:52

bimetalic flow Views by Engineer

  오늘의 한마디(Guillermo Calvo)나 다른 sonnet님의 글 중 외환 거래에 대한 것들을 보고.


  이 책은 자연과학 서적이며 그렇게 보아야 마땅하지만, 인간의 협력과 분업 행동을 다루기 때문에 꽤 많은 부분을 경제 행동에 할애했습니다.

좀 인용이 길지만 283~286p(번역본)를 옮겨 보도록 하죠.

=================================================================

  .... 15세기 프랑스의 부패한 관료 자크 쿠오(Jacques Coeur.  옮긴이 주; 자크 쾨르가 더 관례에 가까울 텐데 어떻게 쿠오가 됐는지 참...)를 들 수 있다.  그는 찰스 7세(옮긴이 주; 샤를 7세라고 했어야죠)의 주조소장으로서 은화를 주조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는 1453년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에, 재판 기록을 통해 그의 축재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는 마르세유 항에서 군함의 뱃머리 가득히 은화를 싣고 시리아로 가서 그것을 판 뒤 금화를 구입해 프랑스로 돌아오는 방법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배 한 척에 은화 1만 마르크(옮긴이 주; 신성로마제국의 마르크 은화를 의미합니다)를 실어 보낸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쿠오에 따르면, 같은 양의 은화를 시리아로 가져가면 프랑스에서보다 14%의 금을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차익만으로도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는 정도의 위험은 보상받고도 남는 것이었지만, 여기에 한술 더 떠 그는 은화에 동을 섞어서 무게를 더 나가게 한 뒤 순도를 보증하는 백합 무늬의 황실 문양까지 새겨 넣었다. [ 옮긴이 주; 이 사람, 진짜 사기 치기로 맘 먹은 모양이군요 ^^ ]
  그러나 쿠오의 부패보다도 프랑스와 시리아 간에 이렇게 큰 가격 차이가 생긴 이유가 더 재미있다.  이야기의 발단은 쿠오의 시대보다 500년 전인 10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0세기 말쯤 아랍권에서 은화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반면 기독교권에서는 금화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은 광산의 생산량과 질 좋은 동전을 주조하는 능력이 반영된 결과였다.  유럽은 은이 필요했고 아랍은 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은에 대한 금의 가치는 기독교권보다 아랍권에서 더 높이 매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십자군 운동이 없었다면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십자군들은 몸에 지닐 수 있는 최대한의 금을 갖고 갔으나, 전공을 세운 대가로는 은을 선택했다.  레반트(옮긴이 주; 현재의 시리아, 이스라엘 등 중동 일대를 칭합니다) 지역에 자리를 잡자마자(옮긴이 주;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하며, 상당 기간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합니다) 그들은 은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십자군이 주조한 많은 은화가 그들과 거래를 튼 이슬람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이어서 이슬람인들 간의 거래에도 쓰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십자군들도 아랍인들에게서 빼앗거나 거래의 대가로 받은 금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십자군들은 직접 금화도 주조했는데 아랍에서 빼앗은 형판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에 따라 아랍의 금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까지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십자군을 통해 많은 양의 은이 아랍 세계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아랍은 지난 1세기 이상의 공백을 거쳐 은화를 재도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아이러니칼하게도 은의 수요가 늘어났고, 유럽에서 은에 대한 금의 가치와 아랍에서 은에 대한 금의 가치가 역전되었다. [옮긴이 주; 원래 아랍권에서 금이 귀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은이 귀해졌다는 얘깁니다. ]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실업가들에게는 큰 이익을 챙길 기회가 생겼다.  그들은 에이커(옮긴이 주;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보면 팔레스타인에 '아콘'이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아마 여기 아닌가 합니다) 지역 같은 기독교 고립 지역에 잔류하거나 아예 유럽 본토로 돌아와서 아랍 은화를 위조하고 그것을 배에 실어 아랍으로 가서 금과 교환했다.  밀라레스(millares)라고 불리던 이 동전에는 '알라 이외의 신은 없고, 마호메트는 그의 사도이며, 마디(Mahdi)는 우리의 지도자이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제작한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백작과 공작, 심지어 아를르나 마르세유 및 제노바의 주교도 끼어 있었다.  이같이 불경스런 작태에 깜짝 놀란 신앙심 깊은 프랑스 왕 루이는 무능한 교황 이노센트 4세를 설득해 1260년대에는 밀라레스 위조를 금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위조는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13세기에만도 대략 4000톤의 은(옮긴이 주; 은은 보통 트로이 온스 단위를 씁니다.  31.1g이죠.  4000톤이면, 얼마나 많은지 정말 징~합니다)에 해당하는 30억 개의 밀라레스가 아랍 세계에서 쓰일 목적으로 기독교 세계에서 제작되었다.  그것은 25년간 유럽 전체 은광의 최대 생산량에 맞먹었다.  세르비아, 보스니아, 사르디니아, 보헤미아의 은광에서 생산된 전량의 은이 밀라레스 제작에 쓰였다.  말할 것도 없이 유럽의 은화는 점차 위태로워졌다.  프랑스 은화를 갖고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남부 지방에 가져가 녹여서 밀라레스로 다시 주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국내의 화폐 공급은 어려워졌다.  화폐의 가치는 저하되기 시작했다.
  아랍 사람들은 이 은화의 대가로 무엇을 줬을까?  금이었다.  아라비아와 중앙 아시아의 금광 외에도 가나에서 사하라 사막을 건너 금을 가져오는 낙타 행렬이 가세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금이 모여들어 한때 이집트에서는 금이 은과 같은 가격, 심지어는 소금과 같은 가격으로 거래된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이탈리아 통치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라에 은이 절망적일 정도로 부족한데 상인들 손에는 밀라레스 은화를 팔아 받은 금이 넘쳐난다면, 통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조치는 금화를 주조하는 것이다.  1252년에 베니스와 제노바가 그렇게 하기 시작했고(옮긴이 주;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보면 1251년 제노바, 이듬해에 피렌체, 베네치아는 1284년에야 금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 세기 뒤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이를 따랐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엉뚱했다.  금의 수요가 늘어나서 밀라레스 무역의 이윤은 더 커졌다.  게르만의 대다수 통치자들이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한 1339년, (유럽에서) 1그램의 금은 21그램의 은과 교환되었다.  그러나 시리아나 이집트에서 1그램의 금은 10~12그램의 은의 가치밖에는 없었다.
  bimetallic flow(複本位 유동)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이상한 현상은 전혀 무의미해 보인다.  ..... 복본위 유동은 오늘날 통화 시장의 중세적 형태였다.........

  ==========================================

  교훈 ; 

  1. 그 종교 위주의 중세 때에도 돈이 실제적으로 종교 교리보다도 우위였다.
  2. '1원 같은 10원짜리'에서 말한 현대 금속 화폐나, 중세 시대의 화폐나 똑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3. 어떤 경제 정책이라도 - 아무리 합리적이라 해도 - 꼭 부작용을 동반한다. (부작용이란 말이 뭣하면,
      '의도하지 않았던 시장의 반응'이라고 해도 되겠다)

  漁夫

ps. ('11.1) 迪倫님의 이 글도 보시면 재미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통화에 관한 모든 글을 같이 보는 편이 좋지요.



덧글

  • BigTrain 2008/04/04 00:05 # 답글

    에이커(아마도 acre)는 아마도 '아크레'( http://en.wikipedia.org/wiki/Acre,_Israel )가 아닌가 싶네요. 역자분이 정말 순도100% 영어로만 번역하셨군요... ㄷㄷㄷ
  • 어부 2008/04/04 00:15 # 답글

    아 그랬군요. 무조건 다 영어식 발음으로 보니까 되~게 이상합니다.
    그런데 Acre=아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아콘이 1291년 팔레스타인에서 마지막으로 이슬람에게 함락된 도시라고 하고 본문에서 '기독교 고립 지역'이란 말이 있으니 아마 맞는 듯합니다.
  • Ha-1 2008/04/04 00:17 # 답글

    바이메탈 하니 heat sensor 가.. (퍽)

    unintended consequences 라고 한다죠? ^^;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 금을 '먹'거나 은을 '입'고 살 수는 없다는 점인 듯 합니다...
  • 어부 2008/04/04 00:25 # 답글

    저도 처음에는 heat sensor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
    전 경제학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영어로 정확히 뭐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만약에 금을 먹거나 은을 입고 살 수 있었다면 화폐가 되지도 못했겠죠.
  • 서산돼지 2008/04/05 06:39 # 답글

    어떤 책에서 고대시대의 끝을 이슬람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해서 지중해의 동과 서를 차지하여 지중해 무역이 끝나는 7-8세기로 보더군요. 그리고 그 증거로 프랑스 수도원에서 그 이전까지는 이집트에서 수입한 파피루스를 사용하다가 후에는 양피지를 사용하는 것을 들더군요. 그래서 저는 중세시대 유럽과 아랍세계간의 무역이 확 줄어들었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긴밀한 관계가 있었군요. 역시 인간사회는 서로 나눌수록 늘어나는 가치많은 것 같습니다.
  • 어부 2008/04/05 10:12 # 답글

    아무리 종교로 나뉘어 있더라도 무역 자체가 팍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힘든 모양입니다. 중세 때 이슬람 해적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해적이 훔칠 물건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얘기기도 하고요.
    4000톤이라면 진짜 징합니다. 단 100년 동안 저만한 양의 은이 넘어갔다면 얼마나 무역을 했는지는 대충 상상이 가죠.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내부 포스팅 검색(by Google)

Loading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831

통계 위젯 (화이트)

2334
116
1319221